〔 Archome picks 1-2 :: 말하는 건축가 (2012) 〕
2011년 초, 일민미술관 전시를 마치고 선생님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빨리 편집을 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매일 8-10시간씩 편집에 매달렸다. 타계 1주일 전인 2011년 3월 5일. 선생님이 갑자기 기용건축 직원들을 불러 모으셨다. “내가 오늘 기용건축 직원들과 함께 갈 데가 있다.” 선생님이 갑자기 봄나들이를 가고 싶어했고, 기용건축 직원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했고, 명륜동 집에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앰뷸런스를 대절해서 경기도 광주 아천동으로 갔다. 나는 그때 촬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촬영자를 섭외할 시간도 없었다. 결국 가지고 있었던 아이폰으로 촬영한 것이 영화에 쓰이게 되었다. 유독 봄을 좋아하셨던 정기용 선생님다운 나들이였다. 이 장면을 촬영하며 나는 세상에 과연 이런 장면을 창조할 수 있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했다. 이 장면이야말로 진정 내가 쓸 수 없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정기용만이 창조할 수 있는 장면이구나 라고. 누가 수십 년간 함께 일한 직원들을 이끌고 침상에 누워 하늘과 바람과 나무에 고마움을 표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건 건축가 정기용이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3월 11일 건축비평가를 인터뷰 하던 도중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왠지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서 선생님 댁으로 달려가서 선생님의 죽음을 눈으로 보았다. 정말 많이 슬펐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 보니 굉장히 밀도 있고 특별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스타일리시한 건축다큐멘터리를 촬영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한 건축가의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가 되어버렸다.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곳에 와있었다. 승효상 건축가가 장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박하고 조촐하게 장례식을 하자고 했다. 너무 크게 하지 말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소박하고 작게 하자. 혜화동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영결식을 한 뒤 선생님은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병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 적이 없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영양주사를 맞고 쉬었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나중에 사모님에게 정기용 선생님이 어떻게 투병 중이었는지를 자세하게 듣게 되었고 많이 괴로웠다. 과연 육체적인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는 어떻게 그렇게 계속 일할 수 있었는가? 원래 선생님이 당뇨가 오랫동안 있었다. 2005년 8월 대장암이 발견되어 3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다. 수술을 받고 대장을 잘라내고 항암치료를 1년 6개월 동안 했다. 2007년 2월에 암이 간으로 전이 되었고 이어 폐로 전이 되어 수술하고, 그 다음 다시 간 수술을 했다. 영화를 찍기 전인 2010년에는 복수에 물이 차기 시작했고, 허리에 복수를 빼는 장치를 차고 다녔다. 2008년 겨울에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성대결절이 와서 마이크를 해야만 말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선생님은 지난한 투병 과정에서 죽음을 피해 요양을 간 적이 없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또 일을 하는 등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첫 항암치료를 받은 2006년부터 총 여섯 권의 책을 정리해 냈고, 다큐멘터리를 위해 일하고, 일민 전시회도 치르고, 본인의 작품집도 정리했다. 정기용 선생님은 자기가 사회에 남길 수 있는 모든 말과 생각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가신 거다. 투병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작업을 하고 생산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기용 선생님은 너무너무 강한 사람이었다. 한번도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곧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고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만큼 다차원적인 흔적을 남기고 간 인물이었다.
- 말하는 건축가, 영화 소개 中
우리의 평안한 삶과 죽음을 위해
영원한 집에서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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